어니 뱅크스 / 출처 - 게티이미지하지만 컵스의 구단주인 필립 K. 리글리의 조언 덕분에 수입의 대부분을 투자했고, 현역 시절이었던 1967년 시카고 남부에 '어니 뱅크스 포드'라는 자동차 딜러십을 세우면서 미국에서 두 번째로 자동차 딜러십을 소유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는 등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를 바탕으로 55세 무렵에는 500만 달러가 넘는 자산가가 됐다. 뱅크스가 84번째 생일을 8일 앞둔 2015년 1월 23일 세상을 떠나자, 시카고에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유격수로서 뱅크스는 고질적인 무릎 통증으로 수비 범위가 넓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실수를 줄임으로써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했다. 실제로 그는 통산 3차례나 유격수 수비율 1위에 올랐고, 어시스트 1위도 2차례 기록했다. 1루수로 보직을 옮긴 후에도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진 못했지만 풋아웃 1위를 4차례, 어시스트 1위를 3차례 기록했고, 통산 수비율이 무려 0.994에 달할 정도로 유격수 시절보다 더 나은 수비를 펼쳤다.현역에서 은퇴한 뱅크스는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컵스의 1루 코치를 맡았고, 이후로도 20년간 컵스의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또한 1977년 첫 번째 투표에서 득표율 83.8%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82년 컵스는 그의 등번호 14번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컵스는 2008년 개막전을 앞두고 홈구장인 리글리 필드 앞에 뱅크스의 동상을 공개했다. 뱅크스는 현역 시절 다른 슈퍼스타들에 비해 많은 연봉을 받지는 못했다.사진 - MLB.com, MLB 명예의 전당, 게티이미지노년 시절 어니 뱅크스 / 출처 - MLB.com어니 뱅크스뱅크스는 적극적인 타격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올드스쿨형 타자였다. 이로 인해 볼넷이 적고 출루율도 낮았지만, 그 반대로 삼진도 적어서 통산 8번이나 100타점을 넘겼을 만큼 타점 생산력이 뛰어났다(실제로 100삼진 이상 시즌이 한 번밖에 없었다). 또한, 군 생활 중 무릎을 다친 이후 고질적인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풀타임 첫해인 1954년부터 1969년까지 16시즌 동안 연평균 150경기에 출전했을 정도로 강인한 내구성을 갖춘 선수기도 했다.하지만 이는 뱅크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골드글러브 수상이었다. 한국 전쟁 당시 군에서 다친 무릎의 상태가 점차 악화됐기 때문이다. 무릎 상태가 나빠지면서 뱅크스는 1961시즌 유격수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수석코치 비디 힘슬은 그에게 외야수로 포지션 변경을 제안한다. 뱅크스는 외야수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항상 팀을 먼저 생각한 그는 팀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5월 23일부터 6월 15일까지 좌익수로 23경기에 출전했다.2,528경기 9,421타수 2,583안타 / 타율 .274그뿐만 아니라, 뱅크스는 인종차별의 시대를 관통한 선수였다. 흑백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는 시대에 뛰면서 그는 수많은 빈볼과 반칙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다. 이에 선배였던 재키 로빈슨은 신인 시절 뱅크스에게 "말하기보다는 듣고 인내하라"라고 조언했고, 이를 받아들인 그는 특유의 낙관주의로 인종의 벽을 넘어 모든 MLB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 받았다.MLB Korea 공식 SNS하지만 뱅크스는 젊은 1루수 존 보카벨라와 주전 경쟁에서 승리했고, 1967년 타율 0.276 23홈런 95타점 OPS 0.765로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이듬해에도 그는 경쟁에서 살아남았고 타율 0.246 32홈런 83타점 OPS 0.756의 성적을 남겼다. 그리고 1969년 타율 0.253 23홈런 106타점으로 통산 14번째 올스타에 선정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8월 말까지 지구 1위를 지키던 컵스는 시즌 막판 2위로 추락하며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참고로 이 시즌은 어니 뱅크스의 커리어에서 가장 포스트시즌에 근접한 순간이었다.뱅크스는 1964년 타율 0.264 23홈런 95타점 OPS 0.757로 반등에 성공했고, 1965년에도 타율 0.265 28홈런 106타점 OPS 0.781을 기록했지만, 더 이상 MVP 시절의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그러던 중 컵스는 1966년 '더 립' 레오 듀로셔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MLB 역대 5번째로 2,000승 고지를 밟은 듀로셔는 감독으로서 뛰어난 능력과는 별개로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심판, 언론, 구단 운영진 뿐만 아니라 선수들과도 잦은 갈등을 빚은 인물이다.주요 성적글 - 이현우 SPOTV 메이저리그 해설 위원네이버 tv :뱅크스는 1958년 타율 0.313 47홈런 129타점 OPS 0.980으로 타격 부문 3관왕(홈런·타점·장타율)을 차지하며 MVP에 올랐고, 이듬해에도 타율 0.304 45홈런 143타점 OPS 0.970으로 타점왕 2연패를 달성한 건 물론, NL 역사상 최초로 2년 연속 MVP에 오른다. 게다가 1960년에는 타율 0.271 41홈런 117타점 OPS 0.904로 홈런 1위를 차지했고, 유격수 수비율에서도 가장 높은 수치(0.977)를 기록하며 유격수 부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1편에서 이어집니다.)어니 뱅크스 / 출처 - MLB 명예의 전당***훗날 듀로셔는 "뱅크스가 시카고에서 지닌 위상 때문에 전성기가 지난 그를 트레이드하거나 벤치에 앉힐 수 없다는 것에 좌절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뱅크스는 듀로셔를 존중했고, 그의 영입을 진심으로 반겼다. 뱅크스는 듀로셔가 감독으로 부임한 첫해 타율 0.272 15홈런 75타점 OPS 0.747로 1963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거뒀다. 그러자 컵스는 1967년 봄 뱅크스를 선수 겸 코치로 임명했다. 이는 기량이 떨어진 어니의 출전 시간을 줄이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인스타그램 :어니 뱅크스 / 출처 - MLB.com유튜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