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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급] 애플 공표명령 받은 진짜 이유! 당신도 피해자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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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Sweetie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회   작성일Date 25-06-01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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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2025-044]​[정태식의 애플공표명령 밑줄긋기] 21세기 지정학으로 본 화폐경제​이하경 『달러 없는 세계』 (2019) ​​(바른북스 / 408쪽 / 1만8000원 / 2019년 10월 15일 초판 1쇄 발행 / 2019년 11월 19일 초판 2쇄 발행)​​​□ □ □​​이하경 저자는 『달러 없는 세계』에서 현재의 달러 중심 세계 경제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달러가 세계 기축통화로서 아직까지 큰 위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미국, 중국, 유럽 등 전 세계의 경제적 흐름과 역사적 배경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저자는 책 내내 달러에 의존하는 화폐 시스템이 어떻게 발전해왔고, 현재 글로벌 경제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한다. 그는 특히 달러가 기축통화로 자리잡은 이유와 그로 인해 발생한 국가 간 불균형의 문제를 지적한다. 저자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통화 다양화 및 지역 단위의 경제 협력을 강조한다. 이 책은 경제학 내에서 다루어지는 복잡한 주제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이하경은 급변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강한 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달러 중심의 경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통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위해 국제 사회가 협력하여 글로벌 통화 시스템을 재편할 필요성을 제기하며, 특히 중국과 유럽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결국, 『달러 없는 세계』는 독자에게 현재의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공하고, 미래의 경제 방향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달러의 종말이 가져올 경제적 변화를 대비해야 하며, 이러한 변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 □ ​들어가며​모든 역사적 사건은 돈이 흐르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돈이 흐르는 방향은 역사적 사건의 결과를 좌우한다. / 사람을 보지 말고 사람의 행동을 봐라. 사람들의 행동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단적 흐름을 봐라. 영화로 비유하자면 영화 한 편의 스토리가 집단적 흐름이라면 한 장면 Scene은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들 중 하나고, 영화의 스냅 사진 한 장은 바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1. 격동하는 세계​1.1 미중 무역 분쟁​미국 정부의 움직임은 2018년 초부터 시작됐다. 2월 중순 미 상무부는 수입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에 대한 보고서를 행정부에 제출했고, 3월 초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한 수입 관세를 각각 25%, 10%로 하는 행정명령에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시장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보다 더한 뉴스가 곧이어 터지는데 3월 22일 트럼프 대통령이 슈퍼 301조 조사 결과에 근거해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 기업의 대미 투자 및 인수합병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이었다. p25​2018년 12월에는 중국 최대의 통신장비 제조업체인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의 딸이자 CFO인 멍완저우가 미국의 요청으로 캐나다에서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2021년 9월, 중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미중 갈등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2024년 9월 30일 쉬즈쥔 순환 회장 임기가 종료됨에 따라 화웨이 순환회장직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p26 #화웨이 #멍완저우 ​1.2 미국의 JCPOA 탈퇴​2018년 5월 8일 미국은 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즉 이란과의 핵 협정으로부터 탈퇴한다고 밝혔다. p26​1.3 QUAD와 인도 태평양 사령부​일본 아베 총리는 2007년 인도, 호주, 미국에 4자 안보 대화 QUAD를 제안했었다. p28 / 2017년 10월 렉스 틸러슨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공식적으로 QUAD 안을 제시하고, 필리핀에서 미국, 일본, 인도, 호주 4자 협의체가 열렸다. p29​1.4 상하이 선물 거래소​2018년 3월 26일, 중국이 상하이국제에너지거래소 INE에서 위안화로 결제하는 원유 선물 거래를 시작했다. p29 / 물론 국제 원유시장이 달러화로 거래되는 WTI와 브렌트유로 사실상 양분된 상태에서 위안화로 결제되는 거래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여전히 우세하다. p30​1.5 G7 정상회담과 나토 분담금​2018년 6월 8일 캐나다에서 G7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튿날인 9일, 정상들은 보호 무역주의와 관세 장벽을 배격한다는 내용의 공동선언을 채택해 자유무역 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G7 국가가 합의한 공동선언을 '거짓'이라고 주장해 회담장을 한 편의 촌극 무대로 만들어 버렸다. / 그로부터 한달 뒤 트럼프 대통령과 유럽은 NATO 회의에서 국방비 증액 문제를 놓고 다시 한번 충돌했다. p31 / 유럽의 안보는 좀 더 유럽인에 의해 주도되는 방향으로 재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 러시아의 관계는 오히려 개선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p35 ​1.6 상하이 협력기구​2018년 상하이협력기구 SCO회으니는 처음으로 8개국 체제로 개최됐다. 중국, 러시아, 인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파키스탄 8개국은 유라시아 면적의 60%, 세계 인구의 42%, 세계 GDP의 21%를 포괄하는 다자간 협력기구로 부상한 것이다. p36​1.7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FOCAC)​2018년 9월 중국에서 중국과 아프리카 각국 간 정상회의가 다시 열렸다. p36 /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중국의 투자를 저극 환영하는 편이다. 중국의 차관이 미국 등 서방이 제시하는 조건보다 훨씬 좋기 때문이다. p38​1.8 USMCA 협상 타결​미국 · 멕시코 · 캐나다 협정 USMCA는 지난 1994년 발효됐던 '북미자유무역 협정(NAFTA · 나프타)'을 대체하기 위해 미국이 주도적으로 협상을 추진했다. 미국은 2018년 8월 멕시코와 먼저 재협상을 마친 후, 9월 30일 캐나다와도 협상 타결에 성공했다. p38 ​1.9 중일 정상회담​2018년 10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국을 방문했다. 일본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참여 의사를 밝혔다. 양국은 태국에 정보통신기술 등을 도입하는 스마트시티 건설, 제3국 개발 상호 융자 실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하고, 양국 금융기관들이 참여해 제3국 진출 기업을 지원하는 18억 달러 규모의 공동 펀드도 조성하기로 했다. 양국이 체결한 경제 협력 프로젝트가 52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p40 ​1.10 노드스트림 2​노드스트림 2 사업은 러시아의 항구도시 우스트루가 Ust-luga로부터 독일 북부의 그라이프스발트 Greifswald까지 발트해 해저에 1,200km에 이르는 가스관을 건설해 2019~2020년 가동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다. p42 / 미국으로서는 유럽 국가들에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와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독립을 주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44 ​1.11 혼란의 중동​2011년 7월 군출신 수니파 인사들이 정부 타도를 기치로 반군 단체를 설립하면서 시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1980년부터 아사드 정권하의 시리아와 동맹 관계를 맺은 시아파의 맹주 이란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가자지구의 하마스 등 무장단체에 무기와 물품을 전달하는 통로로 시리아를 이용했고, 이 대가로 아사드 정권은 이란으로부터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아왔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수니파 국가들은 2013년부터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p45​2014년 9월 시리아에 자리 잡은 이라크의 무장세력에 의해 미국 기자 2명이 참수되자 결국 오바마는 이슬람국가 IS 파괴 계획을 발표했다. p46 / 중동에서 발을 빼려는 미국의 노력은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시작되어 이미 이라크에서 대부분의 미군 철수가 이루어졌다. 트럼프는 더욱 단호해서 실제 2018년 12월 시리아 주둔 미군의 단계적 철수가 시작되었다. p47 #시리아주둔미군철수 ​오바마 정부는 이란과의 애플공표명령 핵합의를 통해 기존과는 다르 ㄴ걸프 지역 세력 균형의 접근 방법을 추구했고, 팔레스타인 정착촌 동결 등을 요구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전례 없이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는 이를 다시 뒤집었다. 2017년 12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선언을 한 트럼프는, 2018년 5월 이란과의 핵합의를 파기했고, 그 직후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했다. 결국 걸프 지역에서는 다시 사우디의 손을, 이-팔 문제에서는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회귀해 버린 것이다. p48​2017년 5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첫 해외 순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아 향후 10년간, 1,100억 달러 규모 무기거래를 포함해 3,500억 달러 상당의 대규모 투자계약을 체결했다. p48 / 트럼프는 사우디 정부와의 투자계약 외에도 아람코, 사우디 국부펀드 등이 총 9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의 민간 기업과의 합작 투자에 합의해, 사우디로부터 수천억 달러의 투자를 이끌어 내 미국에 엄청난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고 자평하기도 했다. p49​​2. 브레튼우즈: 사적 금융권력의 국가공권력과의 통합​2.1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과 유럽​미국은 20세기 들어오면서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공장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미국 역시 유럽의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생산력이 증가하자 과잉 생산, 즉 투자의 과잉이라는 문제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는 국민들 - 특히 자본가들 - 에게 시장 확보를 위한 해양으로의 진출 필요성을 자극하고 있었다. p55​2.2 마한 (Alfred T. Mahan)의 ‘해양권력(Sea Power)’론​미국 해군대학 학장 알프레드 마한은 1890년 『해양권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 1660~1783』이라는 책에서 영국이 해양 지배력 확보를 바탕으로 제국이 되는 과정을 상세히 보여준 후, 미국도 대양해군 육성, 해외 해군기지 확보, 파나마운하 건설, 하와이 식민지화 등 4개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p55 #알프레드마한 #해양권력론 ​2.3 달러, 부상(浮上)을 위한 준비를 마치다​17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세워진 영란은행은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의 무역금융에 있어 신용의 최종 대부자 역할의 수행이라는 다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은행 역할의 중심에는 프라이빗 뱅크의 대표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다. 유럽은 영란은행이 세워진 1694년부터 워털루 전투가 있던 1815년까지의 약 120년의 기간 중 약 60년은 전쟁을, 나머지 60년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p56​로스차일드 가문은 런던, 파리, 빈, 나폴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대륙 산업의 중심지에 어음인수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15년 워털루 전쟁이 끝난 후 영국 국채의 약 60%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후 아예 영란은행 주식을 대부분 사들였다. p57​미국은 1차 세계대전 이전의 100년의 기간 동안 14번의 금융위기를 겪었는데, 평균적으로 7년에 한 번씩 위기를 겪었다는 얘기다. 사실 이것이 고도로 집중된 대형 자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위기를 조장하고 위기에 인수합병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 탄생한 것이 당시 미국의 신흥 재벌들로 지금도 잘 알려진 모건, 카네기, 록펠러 등이었던 것이다. p58​2.4 1차 세계대전 : 화려한 데뷔를 위한 무대​1918년 전쟁이 끝나고 나자 파운드화는 달러 대비 30% 이상 평가 절하되어 있었다.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 제1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달러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질서가 탄생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p62​모건과 록펠러가 연방준비제도의 계확을 입안할 때 로스차일드의 고도금융을 모델로 했던 것임은 명백했다. p63 / 연합국의 전쟁 수행 능력은 미국의 신용에 과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전시 재정의 핵심 중개인은 모건 주니어 - 잭 모건 -였다. 영국 정부는 1915년 초 J.P. 모건을 전시 자금 조달 및 무기매입 대리인으로 지정했고, 프랑스도 곧 그 뒤를 따랐다. 잭 모건은 듀퐁과 손잡고 미국 전역에 공장을 세워 화약류를 대량 생산해 유럽에 공급했다. p64​결과적으로 1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유럽의 경제에 미친 중요한 영향은 두 가지였다. 유럽의 부가 미국으로 이전되면서 유럽의 가문 형태의 사적 금융권력이 저물고 미국의 합자회사 형태의 사적 금융권력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달러가 공식적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했다는 것이 바로 그 두 가지였다. pp64~65 ​2.5 독점 금융자본의 문제와 대공황​베리 아이켄그린 Barry Eichengreen은 『달러 제국의 몰락』(2011)에서 중국이 위안화를 국제통화로 만들겠다는 시도가 비록 쉽게 달성할 수 없는 목표이기는 하나 미국도 1920년대 10년이 안 되는 기간에 달러를 파운드를 제치고 국제통화 지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과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p65 ​1929년 연방준비은행은 통화 긴축을 선택하고 금리를 인상했다. 그러자 기존의 과다했던 대출의 많은 부분이 악성 채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렇게 미국에서 시작된 경기 침체가 유럽 대륙까지 퍼져 나갔다. 대공황이었다. 1931년 영국은 더 이상은 금이 없다며 금태환의 중지를 선언했다. 1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100녀누 넘게 유지해 온 금본위제의 포기이자 사실상 파운드화의 기축통화 시대의 종결을 고하는 선언이었다. p66 ​연방준비은행은 금리를 올렸지만 시장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금리 인상의 결과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있던 디플레이션으 ㄹ더욱 가속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을 뿐이다. 이러한 연방준비은행의 실책은 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당선과 독접 자본 권력의 약화로, 유럽 대륙에서는 파시즘의 대두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p67​2.6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뉴딜정책 : 반 독점 자본(Anti-money Trust) 정책​루스벨트는 18세기 중반 로스차일드가 이후 지속됐던 소수의 독점 금융 세력들이 장악했던 금권을 200년 만에, 아니 역사상 처음으로 '민주정부'가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2차 대전의 발발과 미국의 승전, 유럽의 황폐화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리고,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들을 제외한 서방 국가 전체에 이것을 적용하기 위해서 만든 틀이 브레튼우즈 시스템이었다. p71​2.7 케인스식 복지국가​1944년 7월, 서빙 44개국 지도자들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미국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도의 실시를 입안하고, 이의 실천을 위해 국제통화기금 IMF과 세계은행 IBRD, 무역과 관세에 관한 일반 협정 GATT을 만든 브레튼우즈 시스템을 탄생시키기 위해서였다. p72​루스벨트는 1938년 4월 한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서 의견이 일치되어 있으며, 그 최전선은 바로 경제적 안정의 보호에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정부가 경기 불황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야만 합니다. (...) 역사는 독재가 강력하고 성공적인 정부가 아니라 약하고 무능한 정부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민주적인 방법으로 굶주림과 공포로부터 국민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강한 정부를 가질 수 있다면 그들의 민주주의는 성공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자유를 이어갈 수 있는 확실한 최후의 보루는 바로 국민들의 이익을 지켜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정부입니다.&quotp73​당시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극복을 단지 정권의 지속과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지속을 결정할 국가 시스템의 존망이 걸린 문제로 인식했다. 루스벨트는 불평등의 원인인 금융 제벌의 강한 힘이 정부의 힘을 약화시키면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물결이 닥칠 수 있고, 애플공표명령 그 경우 민주주의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염려했다. 국민들 역시 강한 정부를 통해 빈부격차, 불황, 실업, 독과점 등 시장의 오동작이 의심될 만한 상황이 되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지지했다. p74​본질적 의도가 무었이었든 결과적으로 이 체제는 GATT, IMF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자유 무역 확대의 기반을 닦았다. 기축통화 지위를 획득한 달러는 그 체제의 화폐적 지지대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미국은 자연스럽게 자유무역 시대의 패권을 쥘 수 있는 조건을 대부분 성공적으로 정착시켰다. p77​​3. 브레튼우즈: 군산복합 대기업과 국가 권력의 통합​3.1 독점 자본, 막후의 실세​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영향력 있는 외교 관련 싱크탱크인 미국외교협회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를 1921년 출범시킨 엘리트 계층의 목표는 거대 은행 및 데기업이 지배하는 미국 국내의 상황을 유지한 채로 대외 팽창을 통해 경제의 활로를 뚫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p81 ​CFR은 핵심 구성원인 금융가, 기업가, 변호사들이 정부 고위직에 진출함으로서 영향력을 키워 갔고,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6년간 지속된 '전쟁과 평화 연구'를 통해 전후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 체제 구축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브레튼우즈 체제의 뼈대인 IMF와 세계은행, 그리고 유엔 창설을 주도한 것이 바로 이들 CFR의 회원들이었다. pp82~83​3.2 지정학적 배경 : 스피크먼의 주변지역이론(Rimland Theory)​영국 지정학자 할포드 맥킨더 Halford Mackinder는 1904년 『역사의 지리적 중심축』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20세기는 육상 전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 주장했다. p83 / 1919년엔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일하는 책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훗날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이 지배하는 영역이 될 서쪽의 발틱해 연안으로부터 동쪽의 중앙아시아 지역, 이란고원, 텐산산맥, 몽공 등의 영역을 포괄하는 심장부 Heart Land 개념을 제시했다. p84 /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열린 강화회의에서 영국에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해양 패권 세력이 도달하기 힘든 지리적 특징, 향후 진행될 철도와 도로를 통한 육로 수송의 발전, 전후 대륙의 인구증가, 중앙아시아의 곡창지대와 풍부한 자하자원 등 덕분에 심장부는 앞으로 세계패권을 좌우할 지역이 될 것임이 분명하니 견제가 필요하다고. 동부유럽을 지배하는 자가 심장부를 지배하고, 심장부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섬을 지배하고, 세계섬을 지배하는 자가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였다. p85 #할포드맥킨더 #하트랜드 ​3.3 봉쇄정책의 대부(Godfather): 주변부를 장악하라​미국 정치학자이자 지리학자인 니콜라스 스피크만 Nicholas J. Spykman은 1942년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전략』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스파이크만 사망 1년 후인 1944년 그의 이론을 통합한 책 『평화의 지리학』이 출간되는데, 여기서 그는 마한의 해양세력론과 맥킨더의 심장부 이론을 종합하여 미국의 향후 전략적 방향성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p86​3.4 루스벨트, 군산복합 대기업의 역사를 열다​루스벨트는 1942년 1월 전시생산위원회를 창설하고 이 기구에 군수물자 생산 계약에 관한 전권을 위임했다. 위원회 임원은 거의 모두 대기업 간부들이었고, 정부 지원은 당연히 대기업에 집중됐다. p89​3.5 봉쇄정책(Containment)과 냉전​조지 케넌 George F Kennan, 마셜 George C Marshall 등이 포진했던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이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주변의 유럽 국가로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며 거대한 제국 형성의 야욕을 드러냈다고 판단했다. p90 / 이 지점에서 브레튼우즈 체제의 경제적 측면과 스피크만의 지정학적 이론을 하나로 묶어 경제와 안보를 통합한 미국의 구상이 탄생했다. p91​3.6 마셜플랜 : 서유럽 구조작전​1947년 3월의 트루먼 독트린은 고립주의를 우선했던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주의의 길로 나섰다는 것을 세계에 공표한 것이었다. p91 / 또한 당시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경제적으로 강하고 안정된 유럽이 곧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면서 유럽에 대한 원조 계획인 마셜 플랜을 추진했다. p92​3.7 부족한 유동성 : 재군비가 답이다​봉쇄정책의 마지막 단계는 직접적 재군비 정책으로 주변지역 Rimland 전역에 걸친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 단계의 시작이 바로 1949년 4월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여타 서유럽 8개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를 설립한 것이었다. p92 ​NSC-68에서 제안한 정책 노선, 즉 미국과 유럽의 대대적 재무장은 미국 경제 정책의 주요 문제에 대해 뛰어난 해결책을 제공했다. 한국전쟁 중, 그리고 그 후의 대대적인 재무장이 전후 세계 경제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p94​3.8 브레튼우즈 체제의 완성: 군비 확장을 통한 달러 유동성의 공급​지정학적 측면에서 샇펴보면, 이런 체제의 성립은 미국이유라시아 대륙 주변부의 주요 조임목 Choke Point에서 압도적 군사력을 바탕으로 석유를 포함한 해운의 안전을 단독으로 책임지는 상황이 수십 년간, 현재까지 지속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p96​​4. 진정한 달러 기축통화 시대의 개막​4.1 자유무역을 가능하게 한 금태환​금본위제하에서 영국과 무역을 하는 국가들의 통화에는 각국의 금의 보유량에 따라 가치가 매겨졌다. 각국의 자본은 금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자유무역이 확대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p100 /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의 포기를 선언했다. 어쩌면 제국주의와 중상주의,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무역 시대에 대한 종언이었고, 각국의 통화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새로운 전쟁, 즉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예고이기도 했다. p101​4.2 자유무역이 사랑스러운 나라,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제안​자유무역의 배경이 되었던 자유주의와 중상주의는 더 이상 미국의 국민들은 물론 서유럽의 국민들에게도 설득력이 없었다. p101 / 그레서 새롭게 제시된 사상이 바로 민주ㅈ의와 복지국가였다. 미국은 이렇게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제도를 바탕에 둔 자유무역 시스템을 발족했고 이것이 곧 브레튼우즈 시스템이었다. p102 ​4.3 자본주의의 황금기: 웅크린 호랑이, 민간 자본​1950년부터 1971년까지 세계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비록 미국과 서유럽, 일본에 한정된 것이었지만 유례없는 장기호황이었다. 1971년 미국 중산층의 비중의 61%에 달했는데 이는 대공황 이전대비로는 거의 2배 증가한 것이었으며, 2015년 대비로도 약 11%가 더 높은 것이었다. pp102~103 ​군산복합 대기업을 비롯한 자본가들은 저렴한 노동비용, 에너지 비용, 기술 개발에 주어지는 정부 보조와 중산층의 성장에 더해 브레튼우즈 체제가 보장하는 자유로운 무역을 통해 높은 이윤을 얻으며 차근차근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p105​4.4 저유가 정책​소련의 접근을 막고 서유럽과 일본의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가격의 석유를 필요한 만큼 공급해 줄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석유시장을 미국 시장과 서유럽 일본 시장으로 양분하여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런 전략을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950년대에 들어서기도 전에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 중동의 유전을 선점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pp105~106 ​4.5 불안요소 : 유동성 공급과 트리핀의 딜레마​실질적으로 이 시스템은 달러 유동성의 공급에 의존했다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불안요소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원조와 차관을 대신해서 미국의 무역 적자와 미군의 해외 주둔 비용 및 군수물자 개발비용 등의 지출이 전 세계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하는 주요 통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p108​1960년, 예일대학교 교수였던 로버트 트리핀 Robert Triffin은 의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애플공표명령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유동성 공급을 축소하면 세계 경제가 위축될 것이고, 반대로 재정과 무역 적자를 감수하며 달러를 공급하면 결국 브레튼우즈 체제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증언했다. p109​린든 존슨은 196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위대한 사회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의료보험 시스템 도입, 공립학교 재정 지원, 사회 안전망 강화, 교육에 대한 공공 투자 등은 정부 재정 지출을 크게 늘려야 했으므로 재정 지출은 확대될 것이었다. 같은 해 감세법안도 동시에 통과시켰다. 감세는 복지국가 추구 흐름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p109​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시작했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이어지 ㄴ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전쟁 비용은 1,110억 달러였고, 이는 당시 GDP의 2.3%에 해당했는데, 베트남 전쟁비용 외에 기존의 국방비 지출분까지 고려하면 GDP의 9.5%에 달했다. p110​4.6 금 가기 시작하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화폐 경제​1960년대 말이 되면 역외 금융시장으로 도피하는 민간 기업의 달러 규모가 점점 커졌다. 이런 역외 달러 자금이 유통되는 곳은 바로 런던 금융시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규제를 피하려던 미국의 엘리트 계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주로 각국 정부의 통제하에서 자금이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한 브레튼우즈 체제의 경제적 측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p112​4.7 모두가 알고 있던 것과 모르고 있던 것​고정환율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긴축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했다. (...) 1961년 이라크가 석유 자원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하자 다른 산유국들에서도 국유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p115 / 자원민족주의가 1970년대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바로 유가가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이었다. p118​4.8 닉슨 쇼크와 삼각위원회(Trilateral Commission)​1971년 여름 닉슨 쇼크가 발생했다. 이는 사실상 브레튼우즈 체제의 경제적 측면의 해체를 의미했다. 금태환 정지 선언은 달러의 평가 절하는 거부하면서, 인플레이션의 수출은 지속하고, 재화의 수입은 줄이겠다는 미국의 자국 중심적인 입장 표명이었다. p119 / 비록 금값은 계속 상승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금값이 인위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아직도 세상이 금본위제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p120​1971년 8월 닉슨 선언이 발표된 직후, 데이비드 록펠러는 브레진스키와 함께 삼각위원회의 창설 작업을 시작했다. p123 / 그는 세계의 교역이 더욱 확대되고 자유로워지는 것이 역사의 진보라고 믿었다. (...) 1973년 7월 삼각위원회는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p124​4.9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요성 : 스태그플레이션과 총수요 관리정책에 대한 의문​너무나도 높아진 석유에 대한 수요, 산유국들의 석유생산시설 국유화, 달러 가치의 하락, 석유 가격의 상승, 그리고 그에 따른 물가의 상승과 경기 침체 등 1970년대 초반의 상황은 더 이상 현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임이 명백했다. p127​이즈음 경제학계에서는 이미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해 온 일군의 경제학자들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비로 1974년과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거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1899~1992)와 통화주의학파의 거두 밀튼 프리드먼 (1912~2006)이었다. (...) 이들은 공통적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 축소와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복지제도 축소 등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pp127~128 #하이에크 #프리드먼 ​4.10 4차 중동전쟁과 1차 오일쇼크​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10월 12일 닉슨 행정부는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을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중동 국가들은 10월 16일 유가를 17% 인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10월 19일 닉슨 행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긴급 구호자금 지원을 의회에 요구하자 이에 반발한 아랍 국가들은 한 발 더 나가 석유 수출 금지 조치를 취했다. 전쟁 시작 전 배럴 당 3달러 선이던 유가는 단 3개월 사이 11달러를 넘었고 1974년 봄이 되어서는 12달러 선을 돌파했다. pp129~130​4.11 사적 금융 세력의 귀환​이미 브레튼우즈 체제의 자본 통제가 사라진 상황에서 산유국들은 자신들의 금고에 갑자기 넘쳐나게 된 페트로달러를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유럽과 미국의 여러 금융기관에 예치했다. 드디어 무대의 뒤편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던 사적 금융 세력, 은행들에 무대의 전면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p131​4.12 2차 오일쇼크와 폴 볼커(Paul Volcker)​1979년 2월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하고 팔레비 왕조를 대신한 이란 혁명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란 혁명정부는 미국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이 여파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자 주변의 산유국들 역시 실질 구매력의 보전을 위해 유가 상승을 요구하며 감산에 동참했다.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한 것이다. pp132~133 ​연준의장 폴 볼커는 무엇보다 물가안정이 곧 달러의 신뢰 회복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취임 직후 11.2%였던 금리를 그는 3개월 만에 14%까지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계속 오르자 1980년에는 17.5%까지 올렸다. 물가 상승률이 하락하기 시작하고 금값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금리를 다시 낮췄지만, 사우디의 석유 무기화 발표와 함께 금값이 다시 뛰오오르기 시작하자 1981년엔 금리를 살인적인 수준인 21%까지 올려 기어코 물가, 달러, 금값의 세 마리 토끼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는 데 성공한 것이다. p134 #폴볼커 ​​5. 신용화폐 시대: 화수분 경제​5.1 레이거노믹스​일반적으로 레이거노믹스라고 하면 이론적 배경으로 공급주의 경제학, 통화주의, 합리적 기대이론을 꼽을 수 있다. '세금을 내리면 더 열심히 일할 동기가 생겨 소득이 늘고 저축과 투자도 증가해 경제가 성장한다.''정부 개입을 줄이고 적정량의 통화수준을 관리함으로써 물가를 관리할 수 있다.''각 개인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정부의 인위적인 거시정책의 효과는 의도하는 대로 나타날 수 없다.'실제로 1980년대 이후 약 30년 이상의 기간은 위의 논리가 지배한 기간이었다. 이런 논리를 처음으로 정책에 도입하는데 공헌한 학자들이 바로 시카고학파에 속하는 밀턴 프리드먼, 아서 래퍼, 로버트 루카스 등이었다. p138 #레이거노믹스 #밀턴프리드먼 #아서래퍼 #로버트루카스 ​5.2 페트로달러 재활용(Petrodollar Recycling)에 관한 음모론적 시각에 대하여​금융위기 즈음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쑹홍빙, 윌리엄 엥달의 책들은 '페트로달러'라는 말이 대중들에게 널리 익숙해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핵심적인 논리는 이렇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있을 무렵 사우디가 석유 수출의 결제를 달러만으로 하기로 합의하는 대신 미국은 사우디에 무기를 제공 - 수출 - 하고 안보를 보장해 주기로 했다. 이 과정은 미국이 패권을 추구하기 위한 음모의 일환이고 이를 설계하고 추진한 것이 데이비드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를 중심으로 한 삼각위원회, 빌더버그 회의의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p145​5.3 유럽통합 운동(European Movement) : SG Warburg와 유로본드​1967년에서 1972년 사이 가장 큰 규모의 유로본드 발행은 주도한 은행은 바르부르크의 SG Warburg가 아닌 독일의 도이치방크, 스위스의 UBS였다. 1970년대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한 이들 유럽의 민간은행들은 화수분 경제의 시대인 1980~1990년대에는 시장을 호령하는 지위를 유지한다. p150 / 바르부르크에게 달러 표시 유로본드의 발행은 결국 유럽 단일 통화로 채권을 발행해서 유럽 시장을 통합하는 길로 이어지는 교두보였다. p151​5.4 화수분 경제의 시작​레이건 시대는 사실상 금에 고정되지 않은 불환지폐, 즉 화폐를 발행하는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인 신용화폐 애플공표명령 Fiat Currency 시대가 처음으로 시작된 시기다. p152​5.5 브레튼우즈 유산의 변모​화수분 경제, 즉 신자유주의 경제는 브레튼우즈 체제의 유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반협정이었던 GATT는 보다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규정과 분쟁 처리 방식을 갖춘 국제기구인 세계무역기구 WTO에 자리를 내주었고, 국제통화기금 IMF는 흘러 들어간 달러를 떼이지 않고 회수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는 감시기구로 실질적 역할이 변모되면서 사실상 더 강력한 기구로 거듭났다. pp155~156​5.6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 앨런 그린스펀​폴 볼커가 화수분 경제라는 비행기를 이륙시켰다면 사람들에게 그 비행기가 진정으로 창공을 비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 것은 그의 후임자 앨런 그린스펀이었다. 1987년 8월 그가 연준에취임할 무렵 다우존스 지수는 사상 처음으로 2,000선을 돌파했고, 연초대비로는 40% 이상 상승한 상태였다. 하지만 2개월 뒤인 10월 첫 주 6% 하락에 이어 둘째 주에 12%나 폭락했다. 10월 19일 무려 22.5% 떨어지는 폭락 사태가 벌어졌다. 소위 '블랙먼데이'였다. 1929년 10월 29일의 하락률 11.7%의 두 배에 가까운 낙폭이었다. p156 #앨런그린스펀​앨런 그린스펀은 10월 20일 오전 미국 경제와 금융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한 줄의 단순 명료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전 세계로 퍼져가던 주가 급락은 잦아들었고, 실제로 뉴욕연방준비은행이 공개시장조작을 통해 금리를 떨어뜨리자 시장은 거짓말처럼 안정을 되찾았다. p157 ​5.7 혼란스러운 화수분 경제의 초기​1982년 예일대학교 콜린 브래드포드의 보고서 「글로벌 규모에서 수출국으로서의 신흥공업국의 부상」은 대만, 한국, 홍콩, 싱가포르,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인도 8개국을 일류 신흥공업국으로 지목했다. p159 / 신용화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다는 것은 곧 이런 나라들에 돈이 쏟아져 들어가게 될 것임을 의미했다. p160 ​5.8 모험가를 위한 시대​레이 달리오 처럼 수많은 미국 투자업계 전설들의 이력을 보다 보면 묘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70~80년대에 큰 실패로 바닥에 떨어졌다가 이때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자신을 업그레이드한 후 재기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화수분 경제의 핵심은 '돈이 풀렸다'는 것이다. pp166~167​5.9 화수분 경제의 문제 해결법 : 부채, 부채, 그리고 부채​2007년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할 때까지 화수분 경제가 문제를 해결한 방식은 부채였다. 모든 문제는 돈을 찍으면 해결되었다. 이렇게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시장에는 은행은 얼마든지 신용을 팽창시킬 수 있고, 위기가 발생해도 신용을 더 팽창시키면 해소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졌다. 단지 돈을 찍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친구들을 등장시킬 방법이 필요했다. pp176~177​5.10 파생금융상품 시장의 성장​MIT에서 만난 피셔 블랙, 마이런 숄즈, 로버트 머튼 이들은 공통적으로 수학을 이용해 금융시장의 선물, 옵션 등의 가격 변동을 확률적으로 예측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교류를 이어갔다. 그 결과물이 1973년 발표된 「옵션 및 기업 채무의 가격 책정과정」이라는 논문이었다. p177​이 논문에 제시된 블랙-숄즈 방정식 덕분에 파생상품의 이론적 가격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가능해졌으며, 덕분에 옵션을 부여한 다양한 표준화된 금융상품들의 거래가 시장에서 이루어질 수 있개 되었다. (...)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이미 금융상품의 선물 거래 규모가 기존의 상품 선물 거래 규모를 뛰어넘게 되었다. p178 ​5.11 세계 무역 기구(WTO) 시대의 도래​1985년 6월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 3국 간 솅겐 협정이 체결도;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직후 밀라노 정상회의에서는 1992년 말까지 규제 완화와 자유화 촉진을 통해 단일 시장을 완성하기로 합의에 이르렀고, 1986년에는 기존 유럽공동체 조약을 보장하는 단일유럽의정서가 체결됨으로써 마침내 단일 시장에 대한 법적, 제도적 됫받침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1992년 2월 드디어 각국이 유럽연합조약에 서명하여 유럽연합 EU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갖춰졌다. p186​1994년 4월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세계무역기구 WTO 설립을 골자로 하는 마라케시 합의문을 채택하면서 최종 협정문이 조인되었다. p192 / WTO의 설립은 그 이후의 세계가 GATT 체제 때와 비교해 보다 더 자유로운 무역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될 것임을 의미했다. p193​1980년대 들어오면 최종제품이 생산되기까지 중간재가 여러 단계의 국경을 넘어 거래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에 따라 기업들의 무역 자유화 요구의 목소리도 따라서 커져 갔다. p197 / 1985년 마이클 포터가 그의 책 『경재 우위』에서 가치사슬 개념을 소개한 것은 근 20년가까이 쌓인 이런 경향을 분석한 결과물이었다. p198​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1960), 『후기산업사회의 도래』(1973), 엘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1980) 등은 산업화 사회 이후의 정보화 시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pp199~200​​6. 손뼉을 마주치다: 차이메리카(Chimerica)​6.1 잠에서 깨어난 중국​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978년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으면서 진정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p205 / 당시 천명한 '1개 중심'과 '2개 기본점'은 결국 사회주의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겠다는 선언이었다. p206 / 바로 이어 1980년부터 동남 연해 지역의 광둥성의 선전, 주하이, 산터우, 그리고 푸저우 성의 하문 등 4개 도시를 경제특구로 지정해 본격적인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했다. 1984년에는 천진, 상해, 대련, 청도를 포함한 14개 연해 지역 도시를, 85년과 89년에는 랴오둥 반도와 산둥 반도까지, 1992년엔 마침내 내륙지역까지 개방을 확대하여, 중국은 경제적으로 사실상 전면적 개방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p208​6.2 톈안먼 사태​1989년 5월 덩샤오핑은 계엄령 선포라는 칼을 빼 들었고, 자오쯔양은 사임을, 결국 보수파였던 양상쿤 국가주석과 리펑 국무원 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톈안먼 광장의 시위 군중은 군부대의 무력 동원 끝에 해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p212 ​6.3 일당 독재​한 번 분열이 시작되면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지역의 군벌과 같은 한족 토호들까지 외세와 손을 잡고 내전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공산당 지도부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다당제 민주주의의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것만큼은 개혁개방을 우선하는 덩샤오핑과 사회주의 체제를 중시하는 보수파가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p216​6.4 상해방의 등장​공산당 지도부가 되는 길은 피라미드형 계층 구조에 따라 상부로 단계를 거쳐 올라가는 만들어져 있다. 잘 운영되면 철저한 경쟁 속에서 능력 있는 당원을 간부와 지도자로 선발할 수 있는 시스템이지만, 잘못 운영하면 파벌을 형성해 권력을 독점하고 세습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p219​6.5 톈안먼 사태의 영향 : 태자당과 왜곡된 엘리트주의의 만남​후야오방은 차세대 공산당 간부를 육성하기 위해 1세대 혁명가의 자제들과 공산주의청년단 - 공청단 - 에서 후보 인재를 선발해 관리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 결과 혁명가의 자제들, 즉 태자당에서는 시진핑, 보시라이 드이 선발되었고, 공청단 출신 중에는 후진타오, 리커창, 왕양 등이 선발되었다. p220​상하이시 당서기 장쩌민은 태자당도 공청단도 아니었다. 장쩌민은 보수파와 개혁파의 타협의 결과로 당 총서기의 일인자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p221 / 장쩌민은 자신의 지역 기반인 상하이를 포함한 연안 지대에 막대한 투자를 끌어들였고 이를 통해 단기간에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1997년엔 애플공표명령 7명의 상무위원 중 4명이 상해방이었다. p223 / 장쩌민과 상해방이 태자당과 손잡고 나아간 노선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유를 강화하는 한편 정치적인 면에서는 통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p224​6.6 투자은행, 그들과 손을 잡다​1992년 상하이의 개방과 푸동지구 개발을 주도한 장쩌민과 주룽지가 공산당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 미국의 민간 투자자들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해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아챘다. 골드만삭스의 공동대표 헨리 폴슨은 1994년 모건 스탠리의 뒤를 이어 베이징과 상하이에 투자 사무소를 개설했고, 모건 스탠리와 공동으로 중국의 민간 보험사인 핑안 보험에 공동 투자자가 되는 데 결국 성공했다. pp226~227​6.7 엘리트와 태자당, 그리고 국영기업의 민영화​탕웨이는 1993년 베어스턴즈 홍콩 사무소로 옮기면서 마침내 베어스턴즈 아시아 CEO가 되어 중국 투자의 선봉장이 되었다. 한편 전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의 4남의 부인 런커잉은 광둥성 서기 런중이의 딸로 탕웨이의 설득으로 베어스턴즈 홍콩 사무소에 합류했다. p228​런커잉은 베어스턴즈에 근무한 7년 동안 광선철도회사, 베이징얀화 석유화학회사 등 굵직굵직한 국영기업들을 홍콩, 뉴욕증시에 상장시키는 자문 계약을 따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뉴욕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 9개 중 1996년 이후로는 4개의 기업이 상장했고, 그중 3개가 베어스턴즈의 자문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었다. p229​6.8 건설적 관여(Constructive Engagement)​클린턴의 대중국 정책은 건설적 관여 정책으로 불렸다. p236 / 중국을 친구로 대하면 그들은 결국 친구가 될 것이고, 중국을 적으로 대하면 그들은 결국 적이 될 것이다가 건설적 관여 정책의 관점이었다. p236​덩사요핑의 남순강화와 장쩌민의 권력 공고화 이후 중국의 보수파의 목소리는 잦아들었고, 개혁론자들은 경제 선진화 전략으로 WTO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저임금을 활용해 제조업을 키우고, 수출길을 열기 위해선 중국산 상품의 판로를 개척하고 기술과 자본을 투자받아야 했다. WTO 가입이 지름길이라는 결론이었다. p238 ​​7. 인구 요인과 불평등의 딜레마: 문제는 소비야​7.1 전전(戰前) 세대의 퇴장​미국의 베이비붐 세대 (위대한 세대라고 불리고 한다)는 1946년부터 1964년사이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인구 규모는 7,800만 명으로 미국 인구의 약 30%에 해당한다. p241 /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 세대인 침묵의 세대 (1925~1945년 사이 태어난 세대)는 1,2차 세계대전을 겪었고 큰 빈부격차, 농촌에서 도시의 교외로 이주한 공업화 1세대에 해당했다. 이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와는 달리 2차 대전이 끝난 후 대공황, 전쟁 같은 문제가 반복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대가족을 이루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늘어난 가족, 특히 자녀 세대 - 베이비붐 세대 - 에게 안전한 삶, 안정적인 삶, 더 나은 삶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p243​7.2 미국 연금 체계의 발달​OECD는 3층 연금 모델 방식을 권고했다. 1층은 기초연금, 2층은 소득 기여에 기초한 공적, 사적 퇴직연금, 3층은 개인 연금이다. p246 / 1970년대 50대에 접어들던 주요 유권자 세대였던 침묵의 세대는 직접적으로는 자신들의 퇴직연금을 안전하게 수령하기 위해, 간접적으로는 자녀 세대의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안전한 퇴직연금 체계를 정치권에 요구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하 ㄴ응답은 확정급여형(DB) 연금의 수급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퇴직 연금제도의 가장 큰 변화는 확정기여형(DC)에서 일어났다. p250​7.3 전면에 등장한 베이비붐 세대​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 Imagine」은 1971년 발표되었다. 전 지구가 조화롭게 Global Harmony 살기를 꿈궜던 것과는 달리 빈부, 세대, 이익집단 간의 갈등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소유를 내려놓는 것을 상상해보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전세계는 역사상 가장 소비에 열광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p251 ​베이비붐 세대를 포괄하는 에너지는 무엇ㅇ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오히려 물질적 풍요, '소유와 소비'였다. 1960년대 히피즘의 자유 Freedom은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의미했다. p252 / 부모 세대의 '절약과 저축'에서 '소비와 투자'로 사고의 관점이 이동한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소비-투자-를 위해부채를 일으키는 것을 합리적인 행동으로 여기는 세대였다. p253​히피들은 여피 Yuppie로 대대적으로 전향했다. 여피족이 추구하는 '자유'는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자유'였다. 이 세대가 부모 세대로부터 권력을 이양 받아 시대의 주류로 나서기 시작한 것은 공교롭게도 바로 1970년대 후반 무렵부터였다. 1976년 아칸소 주의 법무부 장관으로 선출되었다가 2년 뒤 불과 32세의 나이로 주지사기 된 이 세대의 선두주자가 1946년생인 빌 클린턴이었다. 1975년 불과 26세에 상뭄 선물 트레이딩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자회사를 설립했던 레이 달리오는 1949년생이다. 1955년생인 빌 게이츠와 스트브잡스가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을 설립한 것은 각각 1975년과 1976년이었다. p254 / ERISA와 401k는 그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접어두고 소비에 나설 수 있는 든든한 뒷배 역할을 했다. p255​7.4 궁극의 지표 : 인플레이션​거시경제 운용이 통화정책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 앨런 그린스펀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실제로 기술의 발달과 정보 혁명은 이들 시카고학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실의 결과는 통화 증발에 의한 물가 상승 우려는 생산성 향상에 의한 총공급 증가에 의해 충분히 감소되는 것처럼 나타났다.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남자는 물가와 실업을 모두 성공적으로 관라하면서 국민소득 성장을 꾸준히 이끈 마에스트로 대접을 받았다. p258​7.5 신케인스주의? 사실은 시장친화주의​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자 새롭게 무장한 신케인스주의자들이 우파인 시장주의자들을 밀어내고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p258 / 필립스 곡선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율이 낮아지면 실업률이 증가하게 되고 이는 경기가 침체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를 방치하면 이제까지 발행한 어마어마한 양의 통화가 수축하기 시작하면서 마치 엄청난 질량이 한 점에 모여 생긴 블랙홀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더 수축하듯이, 멈출 수 없는 디플레이션의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할 것이 예상되었다. p262 ​지고의 가치는 어떻게든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버냉키도, 옐런도, 서머스도, 크루그먼도, 숨 고르고 있는 과거의 탈규제 만능주의자들도 이 점에서는 모두 한 팀이었다. 이들 모두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어떻게 소비를 자극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p263 ​7.6 고장 난 필립스 곡선​필립스 곡선은 1958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가 1861년부터 1957년 사이의 영국의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명목임금 상승률과 실업률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 즉 반비례의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나타낸 곡선을 말한다. 실업률이 떨어지면 노동자에 대한 초과 수요가 발생해 임금이 인상되어 물가 상승 압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p263 / 그런데, 금융위기 이후 이 필립스 곡선이 제구실을 못하기 시작했다. p264 ​7.7 소비의 구조​1980년대가 되면서 이전 세대와는 소비에 대한 성향이 달라진 베이비붐 세대가 주류 세대로 떠올랐다. 그들은 사실상 충분한 신용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인류 최초의 세대였다. p266 /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지가 2017년 3월 발표한 세계 주택가격지수에 의하면 1980년 가격 대비 2008년 금융위기 직전 미국과 캐나다는 약 4.8배, 호주는 약 8배, 영국은 10배, 뉴질랜드는 13배로 주택가격이 올라 있었다. p274 ​7.8 공급 중시의 딜레마​1980년대 이후로 중산층이 감소하고 소비 여력은 감소했는데 그 원인 중 첫 번째는 바로 통화 공급의 증가와 낮은 이자율로 자본을 조달하기가 쉬워진 상태에서 기술이 자본을 강화하는 애플공표명령 방향으로 발달했다는 것이다. 공급망을 관리하거나, 신기술을 개발하는 등 반복적이지 않은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고숙련 근로자들은 오히려 숙련 프리미엄을 인정받아 소득이 더 증가한 반면, 기술의 발달에 의해 추가적인 자본 투입으로 대체되기 쉬운 반복성이 높은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는 로봇이나 정보통신 기술에 의해 대체되어 오히려 감소했다. 그 결과 중산층은 감소했고 덕분에 수요의 측면에서 소비 여력은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p290​7.9 인구구조의 변화가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베이비부머들은 감소하는 유소년 부양비와 낮은 노인부양비 하에서 스스로를 위한 소비에 저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X세대는 인구통계적으로 유소년 부양비가 초시한 일정하거나 하락하고 있는 추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위한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WTO 체제 하에서 숙련 프리미엄의 증가가 자녀 교육비에 대한 지출을 증가시켰기 때문이다. p294 / 숙련 프리미엄의 증가로 인한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의 확대, 비숙련 근로자의 일자리 감소는 자녀 교육비 지출의 증가를 가져왔다. p295 / 숙련 프리미엄의 가치는 베이비부머의 시대를 살 수 있었던 행운과 비교하면 참으로 미미한 것에 불과했다. p300​베이비부머라는 큰 인구집단이 처음으로 은퇴하기 시작한 2010년 이후부터는 정부의 예산 운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경기 부양과 같은 특별한 지출이 아닌 일반적인 수준의 지출을 위해서도 재정적자를 크게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20년대 후반부터는 적자에서 순 이자비용이 차자하는 부분이 급증하고 약 2040년이 되면 이미 의무지출에 순 이자비용만으로도 세수를 초과하게 될 것으로 의회 예산처는 예상하고 있다. 그러면 국방비를 포함한 임의지출은 모두 빚으로, 즉 국채를 발행헤서 해야 하며 그 결과 이자비용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pp304~305 ​​8. 금융위기, 그 전과 후​8.1 재건된 브레튼우즈 시스템 : 새로운 주변부​역사속으로 사라진 브레튼우즈 시스템은 미국이라는 중심부와 서유럽과 일본이라는 주변부를 구조의 기본으로 만들어졌다. WTO로 새롭게 되살아난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경제적 측면 역시 중심부에는 여전히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있었다. 새롭게 주변부 역할을 해줄 국가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국, 대만 등 외환 보유고 축적국들이었다. p308 / 화폐가치의 절상을 막기 위해 달러를 사들이는 만큼 자국 화폐를 발행한다는 것은 자국 물가 상승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p310​8.2 그린스펀 수수께끼(Greenspan Conundrum)​10년 만기 국채와 같은 장기 채권으로 잉여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미국의 재무부 자금은 공급 과잉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민간의 투자 이익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공급 과잉이 된 민간 자금은 고수익 투자 대상을 애타게 찾아다녔고, 그 과정에서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같은 고위험 상품들이 만들어졌다. p314​8.3 미국, 핸들을 틀다 : 리쇼어링(Reshoring)과 제조업 강화 정책​금융위기 발생 직후 대통령에 취임한 오바마의 선택은 고용 창출을 위한 미국의 제조업 강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리쇼어링 정책이었다. p315 / 금융위기를 겪으며 실업률이 치솟자 제조업 취업자 수는 역대 최저인 1,140만 명 수준까지 떨어져 버렸다. 오바마는 2010년 8월, 전통적인 제조업을 다시 강화하여 수출을 늘리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제조업 증강법에 서명했다. p316​8.4 변화할 수밖에 없는 중국​중국은 오바마가 제조업증강법에 서명하고 2개월 후인 2010년 10월 제12차 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수출 중심의 경제 성장에서 탈피하여 내수 중심으로 전환하고, 이를 위해 경제 성장률을 밑도는 개인소득 증가율을 끌어 올리고 도시와 농촌 지역 간의 소득격차를 축소하는 것이었다. p320​8.5 중국의 선택 : 신형대국관계​2012년 2월 다음 주석에 오를 예정이던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해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조 바이든을 만나 꺼내든 용어는 '신형대국관계'였다. p322​8.6 다시 열린 지정학의 시대​2013년 10월 동남아시아를 순방 중이던 시진핑은 인도네시아에서 중국과 아세안의 공동운명체 관계를 강조하며 '일대일로'계획을 발표했다. 2015년 5월에는 국무원 총리 리커창이 공식적으로 '중국제조 2025'계획을 발표했다. pp323~324​2012년 중국사회과학원 소속의 학자로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 정권까지 외교 분야에서 책사 역할을 하고 있는 왕지스 (王緝思) 교수는 중국의 서진정책 추진의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중국이 서쪽, 즉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 방향으로 진출을 도모하게 되면 동쪽 해양에서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피할 수 있을 것이고, 미국 또한 낙후된 유라시아 지역 개발을 반대할 명분이 없어 대립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pp325~326 / 중국은 미국채에 투자하는 달러를 줄이는 대신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인프라 개발에 그 달러를 투자하는 길을 선택했다. p327 #책사 #왕지스 #서진정책​8.7 금융위기가 자본시장에 일으킨 변화​서브프라임 사태가 은행들의 경쟁적이고 무분별한 대출 증가에 의해 잉태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2010년 제정된 도드프랭크법이 가장 핵심적인 규제 대상 역시 대형 은행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금융위기를 즈음해서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면서 고령화 시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p330​금융위기 이후 자산과 부채의 만기를 일치시키라는 새로운 규제가 등장하면서 연기금과 보험사는 자산의 만기 구조를 길게, 즉 만기가 긴 상품에 투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문제는 그런 상품은 공급이 아주 적다는 것이었다. 보험과 연기금으로 유입되는 자금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게 커졌고, 그에 따라 장기 투자 ㅇ상품에 대한 수요 역시 만기를 일치시키기 위해 갑작스럽게 급증했다. p332​8.8 ETF​양적 완화와 저금리로 유동성 공급이 이어지자 의도치 않았던 결과가 공모 펀드 시장을 바꿔 놓았다. 액티브 펀드 위주로 운용하던 뱅가드, 바클레이즈 같은 초대형 운용사들이 시장이 유동성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파악하여 발 빠르게 ETF 펀드 위주로 공모 펀드의 상품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저 지수를 추종하는, 즉 시장 수익률을 따르는 패시브 펀드들이 주류가 된 것이다. p336​8.9 변곡점 위에 선 남자​1980년대 이후 대학가와 시민사회의 깨어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인종차별, 여성차별 등에 반대하면서 시작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추구는 페미니즘, 동성애, 이민자 사회의 다양성 등을 모두 포괄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문화적 우월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p342 / 트럼프라는 인물이 한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기우에 불과할까? p345​8.10 외로운 황제​시진핑은 2007년 당대회에서 17기 상무위원 서열 6위의 국가 부주석으로 혜성처럼 중앙 정치계에 등장했다. pp348~349 / 장쩌민이 우군 확보를 위해 2000년 기업가들의 공산당 입당을 허용한 결과, 중국의 내노라하는 기업가들이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자연스럽게 기업과 공산당 고위층과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국가에 정경유착이 있다면 중국에는 당경결탁 黨經結託이 있었던 것이다, p355​만약 시진핑이 전투에서 패한다면 그는 급속하게 힘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비록 즉위식은 올렸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황제는 여전히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p367​​9. 모든 길은 달러로 통한다​9.1 세계화(Globalization)를 가능하게 한 메시지 전송 시스템​1973년 벨기에에 법적 관할을 두고, 미국을 포함한 총 15개국의 239개 은행이 참여하여 브뤼셀에 본사를 둔 국제 은행 간 통신협회 SWIFT라는 복잡한 이름의 기관이 설립되었다. 애플공표명령 1978년 정식 서비스를 시작한 스위프트는 10년 뒤인 1989년엔 72개국 2,800여 개 금융기관이 이용하며 연간 송금 건수가 3억 건까지 성장했다. 1999년엔 189개국 6,700여 개 금융기관이 총 10억 건 이상의 송금 건수를 기록했다. 10년 뒤인 2009년엔 209개국 9,200여 개 금융기관이 38억 건에 달하는 송금 메시지를 스위프트를 통해 주고받았다. 송금 건수가 대략 10년에 3배의 속도로 증가한 것이다. 스위프트는 간단하게 말해 은행 간 국제 송금에 있어서 송금 정보라는 메시지의 신뢰성을 제공하는 기관이다. pp371~372​9.2 달러의 무기화(Weaponization of Dollar)​이란의 핵개발과 관련해서 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이 한창 고조되고 있던 2012년 초, 미국의 공화당 소속의 하원 외교 위원장이 스위프트를 통한 이란 제재 법안을 발의헀다. 이는 이란과 무역을 하는 국가나 기업은 돈, 즉 달러를 주고받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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