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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일제 강제동원 노동자 숙소, 45년간 쓴 유생의 일기···등록문화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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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진주꽃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5회   작성일Date 24-06-1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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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일제에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의 숙소인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 유생 기행현이 45년 동안 쓴 일기인 ‘홍재일기’가 국가등록문화유산이 된다.
    또 독립운동가 충정공 민영환의 유서가 적힌 명함인 ‘민영환 유서(명함)’는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됐다.
    국가유산청은 ‘민영환 유서(명함)’를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과 ‘홍재일기’를 등록 예고했다고 13일 밝혔다.
    등록이 예고된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부평 미쓰비시 줄사택’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기업인 미쓰비시(三菱) 제강에 동원된 한국인 노동자들이 합숙생활을 한 곳이다. 지금의 연립주택처럼 여러 집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있어 속칭 ‘줄사택’으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도시 노동자들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주거공간으로 사용했다. 국가유산청은 이번에 등록이 예고된 유산의 범위는 부평구 소재 1329㎡에 해당하는 34필지라며 일제강점기 역사와 주거사 측면에서 그 가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홍재일기’는 전북 부안군에 살던 유생 기행현이 23세이던 1866년부터 68세이던 1911년까지 약 45년 동안 쓴 일기다.
    모두 7권(책)이며 1책의 제목은 ‘도해재일기(道海齋日記)’, 2책부터 7책까지의 제목은 ‘홍재일기(鴻齋日記)’라고 되어 있다. 홍재일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부안을 중심으로 한 당시 지역사회의 변화상과 동학농민혁명 등 역사적 사건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홍재일기’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린 대규모 군중집회인 백산대회가 열린 일자가 1894년 음력 3월 26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내용이다. 국가유산청은 ‘홍재일기’는 현재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며 19세기 말~20세기 초 역사상·사회상을 새롭게 조명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등록된 ‘민영환 유서(명함)’는 대한제국의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인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이 을사늑약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조하며 순절할 당시 동포들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유서가 적힌 명함이다.
    충정공 민영환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1905년 11월 30일 자유독립을 강조하며 자신의 명함 앞뒤 여백에 연필로 빼곡하게 유서를 남기고 순절했다. 이 명함은 민영환의 옷깃 속에서 발견됐으며 마지막 부분에 ‘결고(訣告) 아(我) 대한제국(大韓帝國) 이천만(二千萬) 동포(同抱)’고 적혀 있어 동포들에게 남긴 것임을 알 수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있다.
    국가유산청은 유서가 적힌 명함은 봉투에 넣은 채로 유족이 소장하고 있다가 1958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됐다며 자결 순국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충정공의 정신을 후세에게 알릴 수 있는 사료적·문화유산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산이라고 설명했다.
    편의점 CU를 운영하는 BGF리테일에서 편의점업계 첫 노조가 설립됐다.
    민주노총 사무금융서비스노조 BGF리테일지부는 지난 12일 설립총회를 열고 김복진 지부장 등 지부 임원을 선출했다고 13일 밝혔다.
    BGF리테일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회사의 성과 배분, 업무부담 증가, 조직문화 등을 두고 불만이 이어져 왔다. 특히 지난해 역대 최고 실적에도 직원들의 성과급 규모는 30% 줄어든 반면, 홍석조 회장 일가가 높은 배당을 받아간 것이 불만에 불을 지폈다.
    지난 2월에는 일부 직원들이 본사 앞에서 트럭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BGF리테일 노조 설립을 준비한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는 직원 3분의 1이 넘는 1300여명이 몰리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BGF리테일지부는 설립결의문에서 우리는 회사의 기본방침이라는 미명 아래 ‘시키면 시키는 대로’가 미덕인 것처럼 포장하는 회사에서 살아왔다며 우리는 언제까지 회사의 요구대로 묵묵히 따라야만 하나. 우리는 회사가 쓰고 버리는 부속품이 아니다라고 했다.
    BGF리테일지부는 보수적인 정부와 언론들이 조장한 노조에 대한 편견과 혐오 이미지만을 생각하고 부정적인 시각이 팽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러나 노조는 헌법이 보장하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다. 이제 우리의 권리를 행사하자고 했다.
    BGF리테일지부는 직원들과 합리적이고 능동적으로 소통하며 직원들의 요구와 이해를 대변하고, 존중받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 갈 것이라며 직원들의 권리 획득과 복지 향상뿐만 아니라 회사의 건강한 성장과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도록 상생을 원칙으로 삼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했다.
    갓 100일 넘은 아들은 심장병을 앓았어요. 남편은 늦깎이 신학대학원생이었고요. 집에 공부방을 차려 아이를 돌보며 돈을 벌었어요. 그런데 남편이 학교를 그만두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는 거예요. 기가 막혔습니다.
    양승희씨(55)는 26년 전 남편이 처음 제빵사가 되겠다고 할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리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남편 서용상씨(54)는 지난해 프랑스 최고의 ‘플랑’ 장인을 가리는 제빵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다. ‘플랑’은 프랑스인의 ‘국민 간식’이다. 2013년엔 유럽인의 ‘쌀밥’인 바게트 제빵 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했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빵집을 낸 첫 한국인도 그였다. 지난해 국내 방송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도 소개가 됐다. ‘프랑스인이 한국에서 최고의 김치 장인으로 인정받은 격’이라는 찬사가 그에게 따라붙는 이유다.
    부부는 최근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나는 파리의 한국인 제빵사입니다>를 냈다. 지난 10일 인터뷰에서 부인 양씨는 지난해 방송이 나간 뒤 한 한국분이 남편을 찾아왔다. 삶을 포기하려다 남편의 사연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우리의 삶을 다른 이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부부의 삶은 ‘무모함’의 연속이었다. 물리학도에서 철학도로, 다시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신학자로 진로를 바꿨던 서씨는 30살의 나이에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늦깎이 제빵회사 견습생이 됐지만 경쟁자들은 이미 6~7년의 경력이 있었다. 경쟁력을 갖추려 제빵 산업이 발달한 일본으로 연수를 떠났다. 그러나 학생 비자를 받지 못해 2주 간격으로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1년 뒤 온 가족이 빵의 본고장인 프랑스로 향했다. 들고 간 돈은 1억원이 채 안 됐다. 연고도 경험도 없고, 프랑스어도 못했다.
    서씨는 빵 하나에 모든 걸 걸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친 짓일지 몰라도, ‘빵을 제대로 만든다’는 목표를 놓고 보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고 그에 따른 위험이나 고생은 대가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아내 양씨는 프랑스 정착 초기 정식 급여를 받지 못하는 연수생 신분일 때에도 남편은 매장에서 전화가 오면 언제든지 나갔다며 연수가 끝난 뒤 해당 업체가 남편과 동업을 해줘서 프랑스에 남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직접 구우면 품이 많이 드는 탓에 프랑스 빵집 80%가 공장에서 바게트를 사 와 ‘전통 바게트’인 것처럼 판다라며 그런데도 남편은 하루 7번씩 진짜 ‘전통 바게트’를 구워냈다라고 덧붙였다.
    서씨는 ‘왜 빵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라며 내가 확실하게 아는 건 내가 빵 만드는 걸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가슴이 공허해질 거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삶을 권유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내가 실패하지 않은 건 사실 운 때문이라며 프랑스에서 내게 연수 기회를 주고 동업해 준 업체 대표, 그 대표를 소개해 준 어학원 선생님, 내가 외면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나를 믿어 준 아내, 이런 행운들이 없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만 꼭 그렇게 살아야겠다면 하나에 모두를 거는 바보가 되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공할 때까지 계속되는 실패를 버티려면 그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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